국세청장, 마스크 제조․유통업체 현장방문, 시장안정에 총력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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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병차 작성일20-03-02 21:33 조회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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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사항은 첨부 파일을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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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선일보] [3] 김병종
조선일보에 연재한 '화첩기행'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11월 금강산 만물상 입구 앞에 선 김병종 화가. 아래는 1998년 11월 23일 자에 실린 김병종 화가의 그림 '하늘 찌르는 만물상의 위용'. /조선일보DB
화가가 직접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이 기획은 천경자의 아프리카 기행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몇 번 해보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1998년부터 장장 3년 반을 계속하게 됐다. 매주 20장 넘는 원고에 그림 두 점씩 그려넣는 대장정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되었을까. 예기치 못한 반응 때문이었다. 가히 폭발적이었다. 가장 어리둥절한 건 나였다. 해외 교포 분들까지 별의별 사연과 우편물을 보내왔다. 각종 보약에 술, 심지어 주방용품까지 선물로 쏟아졌다. 유독 꾹꾹 눌러쓴 손글씨를 동봉해온 분이 많았다. 그중 몇 개를 골라 답장을 쓰다 보면 새벽빛이 희붐해 오기 일쑤였다.
돌아보니 그때가 신문으로서도 '벨에포크(belle époque·좋은 시절)' 아니었던가 싶다. 한창 '화첩기행'을 연재 중이던 1998년 11월, 금강산이 처음 남쪽을 향해 문을 열었다. 모든 언론사가 일제히 사진기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동해항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당시 문화부 김태익 기자가 "금강산을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보자"고 했다. 추운 겨울의 문턱에서 행렬을 따라가며 연필로 재빨리 스케치한 뒤 배로 돌아와 수묵으로 그렸다. 그렇게 11월 22일 자 조선일보 1면에 '금강을 목놓아 부르게 하라'라는 제목의 금강산 관광기, 이튿날 9면에 금강산 만물상 그림이 실렸다. 대체로 잎이 떨어져 스산한 풍경 사진과는 달리, 속필로 그린 먹 그림은 내가 봐도 효과가 좋았다.
'화첩기행'을 처음 시작한 지 어느새 20여년이 흘렀다. 연재 후 여섯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어떤 글과 그림이 20년 넘게 잊히지 않고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작년에 일본편, 올해 이탈리아편 '화첩기행' 초고를 썼다. 신문 연재는 끝났지만 내 생애의 '화첩기행'은 아직 진행형인 셈이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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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선일보] [3] 김병종
조선일보에 연재한 '화첩기행'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11월 금강산 만물상 입구 앞에 선 김병종 화가. 아래는 1998년 11월 23일 자에 실린 김병종 화가의 그림 '하늘 찌르는 만물상의 위용'. /조선일보DB
화가가 직접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이 기획은 천경자의 아프리카 기행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몇 번 해보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1998년부터 장장 3년 반을 계속하게 됐다. 매주 20장 넘는 원고에 그림 두 점씩 그려넣는 대장정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되었을까. 예기치 못한 반응 때문이었다. 가히 폭발적이었다. 가장 어리둥절한 건 나였다. 해외 교포 분들까지 별의별 사연과 우편물을 보내왔다. 각종 보약에 술, 심지어 주방용품까지 선물로 쏟아졌다. 유독 꾹꾹 눌러쓴 손글씨를 동봉해온 분이 많았다. 그중 몇 개를 골라 답장을 쓰다 보면 새벽빛이 희붐해 오기 일쑤였다.
돌아보니 그때가 신문으로서도 '벨에포크(belle époque·좋은 시절)' 아니었던가 싶다. 한창 '화첩기행'을 연재 중이던 1998년 11월, 금강산이 처음 남쪽을 향해 문을 열었다. 모든 언론사가 일제히 사진기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동해항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당시 문화부 김태익 기자가 "금강산을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보자"고 했다. 추운 겨울의 문턱에서 행렬을 따라가며 연필로 재빨리 스케치한 뒤 배로 돌아와 수묵으로 그렸다. 그렇게 11월 22일 자 조선일보 1면에 '금강을 목놓아 부르게 하라'라는 제목의 금강산 관광기, 이튿날 9면에 금강산 만물상 그림이 실렸다. 대체로 잎이 떨어져 스산한 풍경 사진과는 달리, 속필로 그린 먹 그림은 내가 봐도 효과가 좋았다.
'화첩기행'을 처음 시작한 지 어느새 20여년이 흘렀다. 연재 후 여섯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어떤 글과 그림이 20년 넘게 잊히지 않고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작년에 일본편, 올해 이탈리아편 '화첩기행' 초고를 썼다. 신문 연재는 끝났지만 내 생애의 '화첩기행'은 아직 진행형인 셈이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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